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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李承晩) 1875(고종 12) - 1965 독립운동가ㆍ정치가ㆍ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본관은 전주(全州). 황해도 평산출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경선(敬善)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이듬해 8월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를 시해하자,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고 국왕을 구출하여 친일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지명수배를 당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협성회 (協成會)ㆍ독립협회 등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개화ㆍ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로 활약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부패ㆍ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의 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해 10월에 귀국,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 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 하면서 좌우합작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거부, 김구(金九)의 남북협상거부 등의 정치적 반탁, 반공 및 단독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을 주장하여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고, 미군정의 용공정책에 반대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당선되어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이 제정되도록 하여 그 해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하였다.
- 오긍선(吳兢善) 1879(고종 16)-1963
- 의학자ㆍ사회사업가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 인묵(仁默)과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사이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상경 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으나 개화의 물결로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協成會), 독립협회, 만국공동회 간부로 활약하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면서 공주ㆍ논산ㆍ군산 등지에서 선교사의 개인교사를 하였다.
1902년 미국유학을 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해 10월 미국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파견 선교사자격을 얻어 6년만에 귀국, 전라북도 군산 야소병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군산에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직을 맡아가며 청소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구암교회도 설립하였다. 1910년 봄,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가서 광주야소병원장에 취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다.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京城保育員)을 설립하여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하고, 1934년 2월에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취임을 축하하는 명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1942년 1월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임한 뒤로 보육사업에만 전념하였다. 광복 후에는 관계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그간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대한성서공회이사장, 기독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으며,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시민보건위생공로감사장, 민간사회분야 사회사업공로표창, 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정부의 공익포장(公益褒章), 새싹회의 소파상(小波賞) 등을 수상하였다. 죽은 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증되었다.
- 나도향(羅稻香) 1902-1927
- 소설가
본명은 경손(慶孫). 필명은 빈(彬). 도향은 호이다. 서울출생. 양의(洋醫) 성연(聖淵)의 맏아들이다.
1917년 공옥학교(攻玉學校)를 거쳐,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같은해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에 뜻을 두어 할아버지 몰래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학비가 송달되지 않아서 귀국하였고, 192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2년 현진건,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白潮>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해에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에 이어 11월부터 장편 <환희 幻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한편, <옛날의 꿈은 창백(蒼白)하더이다>를 발표하였다.
1923년에는 <은화백동화 銀貨白銅貨>, <17원50전 十七圓五十錢>,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에는 <벙어리 삼룡(三龍)>, <물레방아>, <뽕> 등을 발표하였다. 1926년 다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초기에는 작가의 처지와 비슷한 예술가 지망생들로서 주관적 감정을 토로하는데 그쳐, 객관화된‘나'로 형상화되지 못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일종의 습작기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을 고비로 빈곤의 문제 등 차츰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극복의지를 드러내는 주인공들을 내세움으로써, 초기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사실주의로의 변모를 보여준다.그 변모의 현실화로 나타난 작품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벙어리 삼룡>, <물레방아>, <뽕>이다. 이 작품들에는 본능과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객관적 사실묘사에 의하여 부각되어 있다. 특히, 이들 후기의 애정윤리와 궁핍의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객관적인 관찰은 좌절과 패배, 허무와 감상이 교차하던 192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투영되었던 초기 작품에서의 전환으로, 적극적인 대결로 나아가지는 못하였으나 당대 현실과 사회를 부정적으로 예리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등장인물의 치밀한 성격 창조를 기반으로 한국농촌의현실과 풍속을 보였다는 관점에서, 1920년대 한국소설의 전원적 사실주의로 꼽히기도 한다.
- 서재필 (徐載弼) 1864(고종 1) - 1951
- 독립운동가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제이슨(P.Jason)이다.
전남 보성(寶城)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 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후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ㆍ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1896년 4월 7일 마침내 《독립신문》을 창간하는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신문으로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이상재(李商在)ㆍ이승만(李承晩)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ㆍ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국민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아 1897년 11월에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는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는데,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ㆍ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ㆍ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주시경(周時經) 1876(고종 13) - 1914
- 국어의 연구와 운동을 통하여 일제침략에 항거한 국어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ㆍ백천(白泉) 황해도 봉산출생. 간호원양성학교ㆍ공옥학교(攻玉學校), 명신학교(明信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 서우학교(西友學校)교원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 오성학교(五星學校), 이화학당(梨花學堂), 흥화학교,기호학교(畿湖學校), 융희학교(隆熙學校), 중앙학교(中央學校), 휘문의숙(徽文義塾), 보성학교(普成學校), 사범강습소ㆍ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 담당과목은 1913년 3월 중앙학교의 예로 보아서 지리, 주산, 조선어 등으로 광범하나, 그의 연구업적으로 보아 국어교육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로 나누어지는데, 계몽운동은 배재학당협성회 전적(典籍)과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등 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 김소월(金素月) 1902 - 1934
- 시인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출생. 아버지는 성도(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江村)>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朔州龜城)>, <가는 길>, <산>,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의 <왕십리> 등이 있다. 그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燭)불 켜는 밤>(1925), <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유> (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 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치마>, <금잔디>, <달맞이>등에서 피고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건강한 잠>(1934), <상쾌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삼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ㆍ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하동호, 백순재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 신봉조(辛鳳祚) 1900 - 1992
- 교육자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화암(和巖). 강원도 정선출생
시대에 앞서가는 교육이념으로 중등여성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3ㆍ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문 과(역사학전공)를 졸업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당시 전국을 순회하면서 ‘여자교육의 급선무’란 강연을 하였다. 그뒤 일본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배재고등보통학교로 돌아가 훈육 및 교무주임으로 근무하였다.
1938년 이화고등여학교 교장, 1953년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두 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61년 정년퇴임하였다. 퇴임후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사장과 명예이사장, 서울예술학원 명예이사장, 상명학원 감사, 이사, 이사장, 그외 학교법인 한양학원, 영훈학원, 연세대학교, 재헌학원, 새빛학원, 인덕학원, 배재학원의 이사 또는 부이사장 등으로 사학육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특히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 재직 때에는 조선총독부의 학교재단 몰수에 항거하여 한국인이 주체가 된 유하학원을 설립하여 재정적 자립을 이루었고 광복 후 학교음악ㆍ미술ㆍ체육교육 발전에 힘써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예술고등학교 출신의 국제적인 음악가, 미술가, 체육인을 다수 배출한 공로는 특기할 만하다. 정동교회 장로로 교회발전에 기여하였고 에스페란토운동 유공자 명예회원으로 선임되는 등 일생에 걸쳐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였다.
수상경력으로는 서울 학도체육지도위원 공로표창, 서울음악제전 양악80주년음악공로상, 국민교육헌장 이념구현공로상(대통령), 서울시문화상(교육부문), 제1회사학육성 공로표창, 국민훈장 모란장, 한국로타리클럽 개척자상, 5.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 한국여성단체 공로상, 사학육성 공로상(봉황장) 등이 있다. 1945년 이화가 낳은 애국자 유관순의 행적을 밝혀서 오늘의 유관순으로 부활, 승천하게 한 것은 교육자로서 또한 역사가로서 사명을 다한 것이라 하겠다.
- 윤치호(尹致昊) 1865(고종 2) - 1945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ㆍ민족운동가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 충청남도 아산출신. 할아버지는 취동(取東)이고, 무관출신으로 개화인사였던 웅렬(雄烈)의 아들로,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895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상해를 거쳐 귀국한 뒤 외부협판과 학부협판 등을 지냈고, 1896년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NicolaiII)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참석하였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서재필과 (徐載弼)ㆍ이상재(李商在) 등 독립협회운동을 이끌어갔다.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1898년 8월, 제2대회장이 되어 이해 10월 1만여명이 참석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대외적인 자주국권의 수호와 대내적인 자유민권의 보장 및 근대적인 자강체제의 수립을 포괄하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이를 국정에 반영시켰다. 또한, 독립신문의 사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자주국권운동과 자유민권운동 및 자강개혁운동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뒤 독립협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테러에 의한 1898년 12월 정부의 강제해산조처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운동이 좌절되었다.
- 신흥우(申興雨) 1883(고종 20) - 1959
- 종교인ㆍ교육자ㆍ정치가ㆍ민족운동가
호는 금하(錦霞) 충청북도 청원출생. 한학을 배우면서 개화사상에 눈뜨고 상경.
12세 때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신학문을 익힌 뒤, 1896년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등과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1901년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하여 덕어과(德語科) 학생회대표로 과격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여 투옥되기도 하였고, 1903년 미국에 건너가 남가주대학 의대와 문리과대에 적을 두고 의학ㆍ정치학ㆍ경제학ㆍ법률학을 두루 전 공한 뒤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1912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이사로 >배재학당 제4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14년 10월 공도사(公道社)사장으로 잡지를 펴내는 한편, 1920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로 기독교를 통한 농촌개조의 사회운동과 민족구제의 독립운동에 적극 관여하였다. 1920년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제7대조선체육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특히 1924년부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농촌계몽사업 선도에 나서서 농촌의 빈궁 추방에 주력하는 가운데 1927년 이상재(李商在), 이승훈(李昇薰), 오화영(吳華英), 이갑성(李甲成) 등과 민족좌우연합전선 신간회(新幹會)의 기독교계대표 발기인으로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기독교청년운동을 추진해나가며 1930년 모교인 남가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2년 범태평양조선협회를 결성함과 아울러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을 조직하면서 <기독신보(基督申報)>로 교회여론주도의 역할을 하였지만, 더욱이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으로 고초를 겪었음에도 제2차세계대전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의 토착화 내지 동양화라는 미명 아래 한국기독교의 왜색화에 앞장서는 과오도 범하였다.
광복 후인 1948년 7월 최초의 영자주간지 <유니언 데모크랫(The Union Democrat)>을 간행하고, 특명전권대사 겸 주일대사를지낸 다음 1949년 제4대 대한체육회장에 재임되었다. 30여년간 20여 차례나 기독교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대표적 종교인으로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와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거듭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뒤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 고문과 총무를 지내며 1957년에는 민주당 고문에 추대되어 이승만 반대운동의 대열에 섰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신생(The Rebirth of Korea)>이 있다.
- 김진호(金鎭浩) 1873(고종 10) - 1960
- 기독교 감리교목사ㆍ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상주출생.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군대해산, 헤이그특사사건,고종퇴위 등 의 국난이 겹치게 될 무렵 상동교회의 목사 전덕기 (全德基)의 설교와 인격에 감화되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전덕기의 지도로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 (新民會)에 가입하여 김구(金九), 이갑(李甲), 양기탁(梁起鐸), 이동휘(李東輝) 등과 항일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1905년 이후 상동교회에 설치된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조선역사ㆍ성경ㆍ한문 등을 가르쳤다.
1911년에 상동교회 전도사로 임명되면서 전덕기의 목회와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1912년에는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하여 목사직 훈련을 받았다. 1913년 감리교연회에서 전도사 임명을 받고 상동교회 소속 전도사로서 병 중에 있던 전덕기를 도와 목회에 전념하였다.
1914년 2월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였고, 그해 3월 전덕기가 순직하게 되자 상동청년학원도 문을 닫음으로써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연맹 (YMCA)의 총무였던 신흥우의 주선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연맹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쳤다.
1915년 신흥우가 배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자 1916년부터 배재학교에서 성경과 한문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정동교회 전도사직도 겸직했다. 그때부터 배재학교 학생들로 전도대(傳道隊)를 조직하여 전국순회전도를 하면서 민족계몽사업에 힘썼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감리교출신 민족대표 및 목사 손정도 (孫貞道), 이필주(李弼柱), 현순 들과 함께 이 운동계획에 참여하여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서울시내 각 외국영사관에 전달하는 일과 배재학교 학생들을 시위에 동원하는 일들을 훌륭히 해냈다. 그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면서 8개월의 실형언도를 받고 복역중 심한 고문으로 신장병을 얻어 9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20년 인천 내리교회에 부임, 목회활동을 하였고 그해 10월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1년 다시 배재교목으로 부임하여 1935년에 은퇴할 때까지 학생들에게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40년 함경북도에서 교회분쟁이 일어나자 감독의 특별파송으로 청진, 어항, 경성, 주을, 생기령 등의 교회를 맡아서 목회하였다. 광복 후에는 공산당의 압박을 피하여 1947년 6월 월남하여 한때 분쟁중인 강릉지역에 파송되어 이를 수습하였고, 그뒤 서울 궁정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노령으로 은퇴한 뒤 1960년 9월에 죽었다. 장례는 배재고등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 지청천(池靑天) 1888(고종 25) - 1957
- 독립운동가ㆍ정치가
본관 충주(忠州). 호 백산(白山). 본명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1888년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배재학당 졸업 1908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졸업,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중위로 있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으며,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그 간부에 취임하였다. 청산리(靑山里)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병력을 이끌고 간도(間島)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하였다. 서일(徐一)ㆍ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다가 만주를 벗어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유시(自由)에 집결하였다. 흑하(黑河)사변으로 러시아혁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양기탁(梁起鐸), 오동진(吳東振)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군사위원장겸 사령장이 되고, 그해 군민의회(軍民議會)가 설치되자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고, 1932년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 한ㆍ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무장해제당한 후 그 해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동시키고 뤄양[洛陽]군관학교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그 총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였다. 1947년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